I. 아미타스의 궁전
기원전 600년경, 신 바빌론의 왕 네부카드네자르2세는 북쪽 나라 미티 출신의 아름다운 아미타스를 왕후로 들였다. 숲과 그늘이 울창하고 화초가 무성한 미티에서 자란 왕비는 몇 달이 지나도록 비가 오지않는 그곳의 기후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고향을 그리워했다. 고향을 그리는 마음에 아미타스는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했고, 급기야 아름답던 몸이 뼈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다급해진 네부카드네자르 왕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돌멩이 하나 찾아보기 힘든 몹쓸 땅이었지만, 도시 안에 커다란 인공적인 산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수많은 노예들이 피땀을 쏟은 결과 몇 년 후 높은 산이 세워졌다. 멀리서 보면 온갖 화초와 나무들이 공중에서 자라는 듯 보였기 때문에 ‘공중정원’이란 이름이 붙었고, 왕과 왕비가 도시 전체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정문 앞에는 장업한 궁궐도 함께 지었다. 완성된 공중정원을 본 아미타스 왕비는 매우 기뻐했고, 몇 년을 키워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순식간에 나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바빌론의 제사장이자 역사가였던 베로수스가 그리스인들에게 바빌론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기 위해 쓴 책에 등장한다. 공중정원은 약 2400년 전, 헬레니즘 시대의 시인 안티파트로스가 고대 건축물 중에서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7대 불가사의”를 언급할 때도 등장했다. 7대 불가사의는 기자의 피라미드, 바빌론의 공중정원, 올림피아의 제우스상,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레움, 로도스의 거인 동상, 파로스 섬의 등대, 등으로 안티파트로스는 이 조형물들을 “한번 보기만 하면 영원히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바빌론의 공중정원은 물론 말처럼 공중에 지어진 것이 아니다. 이 이름은 그리스어인‘paradeisos’를 의역하면서 나온 용어로, 직역하면 ‘정원’이라는 뜻이다. 공중정원은 실제로 계단식 테라스 위에 만든 화원으로 후에 영어인 paradise(천당)으로 변화되었다. 바빌론의 공중정원은 유프라테스 강 남동쪽,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에서 약 100키로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는데, 4대 고대 제국 가운데 하나인 신 바빌론 왕국의 전성기인 네부카드네자르2세 때에 세워진 것이다. 전해지는 내용에 의하면, 정원은 궁전 광장의 중앙에 피라미드식으로 지어졌다. 가로 세로 각 400미터의 넓이에 15미터 높이의 토대를 쌓고 그 위에 7층의 건물을 올렸으며, 매 층마다 화원을 만들었다고 한다. 각 층은 단단하게 석주로 떠받쳤고 계단에는 석판, 갈대, 역청, 벽돌, 연판 등의 재료를 깔았다. 화원에는 온갖 꽃과 푸른 나무들이 가득하여 평지를 찾아볼 수 없었고, 진흙으로 된 땅은 큰 나무도 뿌리를 내릴 수 있을 만큼 깊었다. 기원전1세기의 한 작가는 공중정원을 묘사하면서 “무수히 많은 나무들이 높이 솟아 도시에 그늘을 만들었다.”고 표현했다. 나무들은 30센치 둘레에 1미터30센치 높이를 자랑했으며, 멀리서 보면 우거진 숲처럼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II.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다.
이처럼 호화로웠던 공중정원은 오늘날 무너진 유적지와 마른 우물의 흔적으로만 남아있다.
심지어 네부카드네자르 박물관 관장은 이렇게 말한다. “수차례 고증을 통해 살펴봤지만 지금까지도 이곳이 진짜 공중정원의 유적지라고 단정할 만한 증거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곳은 유프라테스 강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데, 자료에 의하면 공중정원은 강변에 있었기 때문이죠.” 사실 공중정원을 묘사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빌론에 가보지도 않고 전해들은 이야기로만 기록을 남겼다. 실제로 바빌론의 자체 기록을 살펴보면, 공중정원을 언급한 글이 한 편도 없다.
진짜 공중정원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어디에 있었는지 아무도 제대로 된 설명을 못하고 있는셈이다. 19세기에 들어와 독일의 한 고고학자는 일련의 증거를 제시하면서 공중정원이 확실히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첫 번째 실마리는 약간의 돌덩어리들이었다. 그것들은 수풀과 토양, 암석,배수관 등의 거대한 무게를 가볍게 떠받칠 수 있을 만했다. 두 번째 실마리는 옥상에서 지면까지 연결되어 있는 축이었다. 공중정원의 물도 그 축을 통해 공급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처마 바로 밑에 있었던 모종의 저장고인데, 저수고였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오늘날 메소포타미아 일대는 기후가 건조하고 식재가 부족하다. 공중정원이 만일 유프라테스 강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면 정원으로 물을 공급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만일 정말로 공급할 수 있었다면 수차가 발명되기 수백년전에 물을 어떻게 정원 꼭대기까지 끌어올 수 있었을까? 기원전 1세기경의 한 역사가는 이렇게 기록했다. “공중정원은 저장된 물을 회전식 나선형 수로를 통해 옥상까지 공급했다. 이런 나선형 수로의 기능은 유프라테스 강의 취수원에서 끊임없이 물을 끌어와 정원 전체를 적시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줄곧 이 회전식 나선형 수로를 아르키메데스의 스크루펌프라고 생각했다. 아울러 그것이 효과적으로 대량의 물을 운송할 수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전 세계의 농업 혁신을 가져왔다고 여겼다. 하지만 고대 문헌을 아무리 살펴봐도 바빌론에서 이런 수차를 사용했다고 언급한 곳은 없다.
학자들은 공중정원에 완벽한 급수 시설이 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노예들이 톱니바퀴를 쉴 새 없이 돌려 지하의 물을 맨 위층의 저수지로 올리고, 다시 인공 하천을 통해 아래로 흘려보내면서 식물에 수분을 공급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학자들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메소포타미아 평원에는 바위가 많지 않기 때문에 공중정원에 사용되었던 벽돌에는 갈대와 역청기와 등이 첨가되었으며, 공중정원에 사용되었던 돌멩이에 연판을 깔아 물이 지반으로 침투하는 것을 방지했다고 한다. 공중정원의 존재 여부에 관한 관심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지만 아직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도 고고학자들의 탐구는 계속되고 있다. 이라크 사람들은 훗날 학자들이 탐구가 성공하여 공중정원의 존재여부를 반드시 알아내길 원한다. 그들은 공중정원의 존재가 증명되고 물 공급의 비밀까지 밝혀진다면 공중정원을 재현시켜 바빌론 제국의 정통 후예임을 증명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발칙한 건축학-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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