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위협
동물의 과시 행동에는 두 종류가 있다. 그 하나는 ‘구혼(애) 과시’이고 이것과 대비되는 또 하나의 과시를 생물학에서는 ‘위협 과시’ 또는 ‘의에’라 부른다. 이 위협 과시는 먼저 말한바 교미를 위한 과시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흥미 깊은 시사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위협이란 단순히 어떤 동물이 같은 종류의 다른 개체를 위협하거나 실력의 우위를 뽐내거나 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방위적’이라는 것을 먼저 확인해 두어야겠다. 즉 어떤 동물이 다른 생물의 접근에 따라 자기 몸이 위험에 노출되었다고 느낄 때, 혹은 몸이 직접 위험에 노출되지는 않았지만 개체 유지를 위하여 필요한 최소한도의 공간 영역이 외적의 침범에 직면했을 때 긴급하게 발전하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위협의 과시다.
인간의 경우도 동물과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비슷한 위협의 테크닉을 활용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예컨대 영화의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악당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린 점잖은 사나이가 도저히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정 그렇다면 어디 한번...” 하면서 웃통을 벗어 던지는데 그 잔등과 팔뚝에 으스스한 느낌을 주는 문신을 새겨져 있다. 그것을 본 악당이 소스라치게 놀라 기가 죽는데 이런 유도 일종의 위협 과시에 불과하다. 문신이라는 것이 나름대로 독특한 과 시력이 있음을 많은 사람은 경험으로 알고 있다. 대중목욕탕에서 이따금 요란스러운 문신을 새긴 사람을 보게 되는데 사람의 생김새나 몸집은 그렇지 않은데 오직 그 문신 때문에 은연중 위압감을 느껴 어느새 욕조 한구석에 가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II. 영역
위협의 과시는 우리 인간들의 생활 공간에서 어떤 형태로 행해지고 있을까?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위협 과시’의 원리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는 ‘영역’의 존재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해 둘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동물이 외적의 침입으로 야기된 반사적 긴장 속에서 상대에게 재빨리 위협을 가하는 것은 그의 몸이 상대의 공격에 직접 노출되기 이전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즉 그들의 방위 경계선은 그들의 몸 주위에 일정한 공간을 설정하고 그어져 있다. 그 공간 설정을 흔히 영역이란 말로 부른다. “이 영역은 내 것이고 네 것이 아니다.” 하는 형태로 같은 종류의 다른 개체를 그 영역으로부터 배제하는 상태가 이른바 세력권이라 부르기도 하는 것의 윤곽이라 할 수 있다. 영국의 조류학자 하워드는 여러 생물에게서 온갖 다양한 기능, 규모 등의 영역이 관찰됨에 따라서 영역 자체의 생물학적 규정도 차츰 모호해지는 듯하다고 했다. 위협의 과시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의 영역이 침범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즉 그 영역의 주인공은 자기 영역을 유지하기 위하여 적을 향해 위협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생활 공간에서 자기의 영역을 주장하고 침범자가 있으면 즉각 반격으로 나선다는 도식의 공간 구성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할 때 크게 보면 한 국민의당의 영토와 그 영해, 영공의 설정, 그를 위한 육, 공군의 존재 따위가 머리에 떠오를 것이다. 이러한 근대 국가가 발달하기 이전의 중세 사회에서는 이런 사회적 영역은 ‘도시’가 담당하고 도시는 에워싼 성벽이라는 구체적인 영역 장치를 건설하여 외적의 침입에 대처하였으며 그 벽을 의지하여 외적을 격퇴하였다. 국가나 도시 같은 집단 방어의 수준에서 개인이나 가족 수준으로 범위를 낮춰서 보면 개인의 주택이나 방 또는 분명히 대상화해서 의식하지 않더라도 각자의 머릿속에서 영역의 한계를 양해하고 살아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III. 개선 도로
앞에서 우리가 이야기한 위협 과시는 건축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되어 왔을까? 전통적인 일본의 주택을 생각하면 번듯한 문기둥을 세우고 그사이에 육중한 문짝을 달아 방어를 단단히 하는 집의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단단히 방어하려는 것은 대문 그 자체만이 아니다. 문의 좌우에는 높은 담장이 있게 마련이고 이 담장은 여러 가지 소재로 된 담장을 생각할 수 있는데 이 저택 전체를 빙 둘러싸고 있어야만 문으로서의 의미를 갖게 된다. 따라서 저택의 주인은 이 문은 통하여 그 영역의 주재자임을 타인들에게 선언함과 동시에 ‘볼일 없는 사람 출입 금지’라는 입간판 없이도 그 사실을 확실히 선언하는 것이다.
다이쇼 시대에 일본에 와서 자리 잡고 살게 된 어느 외국인 건축가는 일본 주택의 담장 중에서도 특히 ‘이렇게 가기’의 다채로움과 그 디자인의 변화에 감탄한 나머지 그것들을 촬영한 사진첩을 해외용으로 출판하려고 고려한 바 있다. 아무튼 일본 사람들의 사유지에 대한 영역 의식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강하게 지속되고 있다.
고대 로마의 황제가, 루이 14세가, 나폴레옹 황제가, 히틀러가 꿈꾸었던 이런 계획적인 가로 상의 군대 행진은 그러한 공간을 절대적 권력에 의하여 소유하는 자의 영역 과시 행동일 뿐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영어의 디스플레이는 프랑스어로 파라든 이며 ‘열병’ 또는 열병식이라는 뜻도 지닌다. 퍼레이드하기에 알맞은 가로라면 위협의 투시도 법적 공간의 깊이가 있게 마련이다. 가령 파리의 거리를 생각해 보자. 도시의 조감도나 지도를 보더라도 근세 이래로 중심지 시가는 이런 유의 디스플레이 디자인을 위하여 거듭거듭 손질이 가해졌고 위협 또는 허세를 위해 의식적읋 화장을 고쳐야 했던 과정이 뚜렷한 흔적으로 남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은 그 옳고 그름을 묻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사실이 현실적으로 있다는 것과 그 사실이 파리 시민뿐 아니라 세계로부터 찾아오는 관광객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는 말은 해두고 싶다.
다른 한편 도쿄의 지도를 펼쳐보거나 조감 사진을 바라보면서 유사한 과시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그 대신 무수한 작은 사유지의 구획이 있고 그 주위에 블록이나 콘크리트나 철 또는 알루미늄 울타리, 생나무 울타리로 세분된 영역 표시가 있고 그 구역의 크고 작음이 소유주의 재산 정도를 나타내고 있다. 역시 여기에서도 도쿄와 파리가 가지고 있는 도시적 디스플레이의 차별성을 분명히 할 수 있다. 어느 쪽이 더 인간적인가, 어느 쪽이 더 쾌적한가 하는 판정은 잠시 미뤄 두자. 다만 도쿄에 사는 사람으로서 실감하는 바는 도쿄에는 이른바 불을 바르라 부를 만큼 디스플레이된 도로가 너무 적지 않나 하는 것이다. 단지 볼리바르를 만들기 위해 루이 14세나 나폴레옹이 필요한 것이라면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냐 하는 생각도 없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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