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철을 어렵사리 넘기고 봄을 맞이하게 된 여왕벌은 땅 위에 꽃이 피고 그 꽃에서 꿀과 꽃가루를 채취할 수 있게 되면 둥지를 만들기 위한 눈부신 활동을 개시한다. 구멍 파기 파가 아닌 공중파 벌, 곧 재료의 장력을 이용하여 공중에 매달린 상태로 자기네 집단을 위한 둥지를 만들려는 벌의 움직임이 두드러진다. 꿀벌을 예외로 하고, 키다리 벌이나 참새별의 여왕은 여왕이라는 이름이 갖는 우아한 이미지에는 당치도 않게 근면하고 고독한 집짓기 노동에 종사한다. 키다리뻘의 여왕은 상수리나무의 껍질이나 삭정이를 잘라서는 이빨로 잘게 썰어 다진 것에 자신의 침을 섞어서 건축 재료로 사용한다.
우선 인가의 처마 밑이나 나뭇가지에서 펄프 상태의 재료를 막대기 형태로 늘어뜨려 가다가 어느 곳에선가 그것을 육각 기둥 모양으로 펼쳐 최초의 방을 만든다. 그리고는 똑같은 육각형 단면의 방을 주변에 연속적으로 펼쳐 나감으로써 벌집 판을 형성한다.
1. 여왕벌
참새벌의 여왕은 나무껍질을 물어뜯어서 역시 침으로 반축을 하여 건축 재료로 이용하는데 키다리뻘의 섬유질이 많은 ‘종이’ 모양의 재료에 비해 강도가 다소 떨어진다. 다만 참새벌의 둥지는 최초로 완성되는 벌집 판에 이어 다시 그 벌집 판에서 아래쪽으로 받쳐주는 기둥이 내려지고 거기서 두 번째 벌집 판이 펼쳐지며 계속해서 세 번째, 네 번째의 여러 계층으로 늘어뜨려 가는 데 특징이 있다. 사람들은 이것을 참새벌의 ‘고층 저택’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참새벌의 둥지에는 이 여러 층의 벌집 판을 전체적으로 몽땅 감싸는 겉껍데기가 마지막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겉껍데기 중에서도 나무 구멍이나 땅속의 빈 곳에 만들어지는 참새벌의 둥지의 겉껍데기는 얇아서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에 약하고 무르다. 이에 비해서 나뭇가지나 인가의 박공널 같은 곳에 만들어지는 참새 벌 둥지는 비바람에 끄덕 않을 만큼의 강도를 지닌다. 겉껍데기의 독특한 바늘 무늬가 이들 건축의 겉모양에 독자적인 표정을 부여하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여왕벌은 각 육각형 방에 알을 낳아 그것이 부화하여 애벌레가 되면 먹이를 날라다 키운다. 성숙한 애벌레는 입에서 실을 토해내어 방을 막아 번데기가 되지만 이윽고 이 번데기에서 태어난 암벌이 일벌로서 여왕벌의 일을 도와주면 여왕벌은 비로소 여왕답게 산란에 전념한다. 꿀벌의 경우를 보면 여왕벌의 일과 그 존재 의미가 키다리 벌이나 참새벌의 여왕벌과는 매우 아니 근본적으로 다르게 나타난다. 여왕벌은 태어나서부터 죽기까지 교미와 산란 이외의 다른 일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 여왕벌은 집 짓는 일이나 먹이를 구하는 일에는 설사 일시적으로라도 관여하는 일이 없고 모두 일벌에게 맡겨 둘 뿐이다. 여왕벌은 알 낳기를 위한 기관이 대단히 발달하였다. 꿀벌의 여왕벌은 ‘알 낳은 기계’라 불릴 정도로 기능이 한정되어 있다.
2. 육각기둥
꿀벌을 비롯한 키다리뻘이나 참새벌 벌집 판의 방은 왜 육각형 단면을 하고 있으며 입체적으로 보았을 때는 거의 육각 기둥을 나란히 세워 놓은 것 같을까? “벌은 삼각자도 각도기도 없는데 어떻게 정확한 육각형을 만들까?” 하는 의문도 생긴다.
그러나 가장 정밀하다고 말하는 벌의 육각형 둥지도 결코 기하학적으로 정밀한 것은 아니며 실제로는 휘고 어긋남이 적지 않다. 그러나 육각형은 대단히 잘 지켜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삼각자도 컴퍼스도 없이...” 하는 감탄사가 불쑥 내뱉어질 만큼 규칙성과 정확성을 갖춘 것은 사실이다. 동물의 둥지에는 없다고 여겨지던 ‘규구준승’이 여기에는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꿀벌은 어떻게 하여 육각형의 연속이라는 건축 구성상의 원리를 갖게 되었을까? 그들로서는 어쩌면 네모꼴 연속의 격자무늬 벌집 판을 만들 수 있었을지 모르고 같은 원리로 삼각형에 의한 삼각 격자 무늬의 연속 양식을 만들어 낼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왜 하필 육각형일까? 최소의 윤곽선으로 최대의 면적을 확보하려면 원이 되고 최소의 표면적에 최대의 용적을 포용하려면 구가된다는 원리는 아마도 동물 둥지의 건축 구성에서 기본 원리일 것이다. 앞에서 작은 꽃밭의 땅속 둥지를 관찰하면서 벌의 세계에 벌집 판이라는 것이 가장 원리적인 모습으로 출현한 것임을 알았는데 그 작은 꽃밭의 원통형 방의 연속 구성이 이미 육각형의 출현은 예고한 것도 말해두었다. 그 ‘원’에서 ‘육각형’으로의 자리 옮김에 대하여는 우리 건축에 대해서도 이미 적용되고 있다는 것도 현실이다. 벌의 생물로서의 각별한 능력 또는 직관력과 계산력, 기술력 같은 것을 전제한다는 난점이 있지만 재료가 비누 거품 같이 집적된 결과라는 파악은 무난하며 ‘최소한의 밀랍으로 최대량의 꿀벌을 수용할 수 있는’ 둥지가 여기 탄생한다.
3. 가고 재료
어찌 되었건 간에 꿀벌을 비롯한 육각 기둥의 건축가들은 계획과 구조 계산에 의해서가 아닌 재료의 물리적 성질에 이끌려 최소한의 밀랍으로 최대의 공간 확보라고 하는 가장 합리적인 건축으로 자신들의 벌집 판을 완성하였다.
재료의 변화는 그것으로 만들어지는 둥지나 건축의 형태와 공간에 대단히 큰 영향을 준다.
땅속에 구멍을 파는 작은 꽃밭처럼 흙을 도려냄으로써 만드는 둥지, 도공이 진흙 덩어리를 쌓아 올려 호리병 형태로 만들 듯이 하는 황다리호리병벌 둥지, 나무껍질이나 이끼 따위를 모아다가 송진 같은 수지를 섞어 만드는 똥볼 둥지, 그리고 집단 주거 형태의 벌집 판은 만드는 꿀벌 둥지 등 그들은 각자의 환경과 생태 속에서 가장 쉽게 구하고 처리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하여 재료의 특성을 살린 집을 짓는다. 그 가운데서도 꿀벌이 밀랍에 해당할 만한 획기적 재료는 무엇일까? 가소성이 있다는 점. 그리고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플라스틱이라는 20세기의 재료가 건축 재료로서 큰 기대를 모았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화학 공업이 산출시킨 재료가 과연 인간 건축에서 꿀벌의 밀랍만큼 결정적인 건축 재료가 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건축 재료가 건축의 형태나 공간에 전혀 새로운 기능성의 세계를 보여 줄 수 있을지 어떨지 솔직히 말해서 확신이 없다. 다만 19세기부터 건축에 적용되기 시작한 또 하나의 공업화 재료인 콘크리트의 출현은 20세기의 건축 역사를 그 이전의 건축과는 다른 것으로 변화시킨 것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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